책과 함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브랜던 크로/전광규)

소망씨 2023. 1. 20. 00:44

2023년 1월 19일(목) 광주새물결교회에서

호개연(호남노회개혁신학연구회) 모임을 가짐

 

제1장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김관수 목사)

 

저자 : 브랜던 크로 : 에든버러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학교수이자 웨스트민스터 신학 저널의 서평 편집자다.

 

능동적 순종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율법의 요구를 다 행하심)

수동적 순종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심)

 

수동적 순종에 의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가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1장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책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대한 책이다. 구원에 대한 성경 가르침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주제다. 이 책에서 목표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아름다운 구주이시며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응답해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점증하는 복잡성

구원 교리의 질문 가운데 가장 시급한 몇 가지를 다룰 것을 요구한다.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우리의 공로는 구원에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타인의 공로에 근거해 구원을 얻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공로의 결합을 통해 구원을 얻는가?

 

안개를 꿰뚫는 핵심 질문

이런 많은 논쟁을 해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신약의 강조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영생을 위해 필요한가?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지 묻는 것이 모든 논쟁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방향 감각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중요한 나침반이다.

 

질문에 대한 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 성경은 참으로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개념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신약의 핵심 강조점 하나를 놓치게 되며, 따라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위의 필요성 및 그 이점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에 주안점을 두고 신약에서 선정한 주제와 본문들을 살피고 있다. 이 책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책이지만, 또한 믿음과 구원, 칭의, 성화같이 관련된 분야도 다룬다.

 

올바른 방안 모색 :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에서 성경적의 유지

한 본문이나 한 저자로 이루어진 성경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어떤 신학 쟁점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모든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신약(그리고 구약)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전제하며, 신약의 목소리들을 일관성 있게 결합하는 것이 타당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를 논하려면 구약도 고찰해야 한다.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우리는 성경 본문을 새롭게 다루되, 이전 세대가 말한 것에 비추어 다루어야 한다. 나는 과거의 해석적 입장이 참으로 정확한 해석이라면 세월의 시험을 견뎌 낸다는 것이 사실임을 종종 깨닫는다. 한 신약학자는 이렇게 한탄한다. “해석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주장들 가운데 많은 것은 전혀 논박된 적이 없다. 잊히거나 무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과 자유롭게 소통한다.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의 탐색과 결합

나의 주된 초점은 성경신학에 있다. 그러므로 내 방법론은 성경신학에 강조점을 두면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 조직신학을 탐색하고 결합을 것이다.

 

결론

간단히 말해 내 목표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영생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2장 칭의의 기초 (요약: 염경철 목사)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의 정의와 순종의 두측면이 칭의의 두가지 유익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 지를 살펴서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 때문에 이야기가 엇갈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예수님의 순종과 칭의

구원과 칭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구출 받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려면 칭의를 이해해야 하고 예수님 자신의 순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칭의의 정의

1)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다. 이는 칭의를 얻거나 칭의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 두가지 유익이 있는데 예수님의 순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3)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이 칭의의 기초이다.

4) 그리스도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신자에게 전가된다. 전가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유일성을보호해 준다. 요약하면 칭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위와 별개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을 가리키며,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에 기초한다.

 

예수님의 순종의 넓은 범위

한 순종의 행위가 칭의와 생명에 이르게 한다면, 가장 분명하고 단일한 순종의 행위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충성이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의 순종의 범위는 십자가 너머까지 확대되어 예수님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순종이다. 어떤 이들은 수동적 순종이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능동적 순종은 십자가 이전에 예수님의 삶을 가리키기 때문에 능동적 순종은 칭의를 위해 필요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은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고 능동적 순종은 오로지 예수님의 삶의 순종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거나 나누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해석학적으로나 부적절하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서로 다른 두 단계가 아니라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신 단일한 순종의 상호 연관된 두 측면이다.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은 성육신의 삶전체에 걸쳐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죄의 형벌적 결과를 감당한 자발적 순종 즉 능동적 고난이였다. 따라서 수동적 순종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율법아래에 사신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도 포함해야 한다. 두 순종은 예수님의 삶의 다른 두 단계를 가리키지 않고 예수님의 통합된 순종의 두 측면을 설명하는 논리적 구분이다. 따라서 이 둘은 능동적 순종은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순종, 영생의 권리와 관련되고 ,수동적 순종은 죄의 형벌적 결과를 당하시고 죄사함과 관련되었다고 구

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가장 극적으로 보게 되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능동적 순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예수님의 역할은 흠없는 재물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외적인 행위, 내적인 순종까지도 행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재물이 되실 자격이 있으셨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 구주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완전한 순종,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에 달려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근거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칭의의 두 가지 유익

1)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과 관련해서 죄사함의 유익: 아담이후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죽음에 이르는 형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은 예수님이 평생에 걸친 순종의 전 과정 내내 하나님의 진노를 치르신 형벌을 가리키며 이는 칭의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상응한다.

 

2)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과 관련해서 영생의 권리의 유익 : 영생을 얻으려면 완전한 순종이필요한데 그 약속을 받았던 아담은 실패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통합된 순종이 주는 유익들도 나누지 말아야 한다. 칭의는 죄사함과 영생의 권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죄를 없애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분리를 제거하셨다. ‘

 

칭의의 전가

전가의 정의

전가는 칭의에서 능동적 차원과 수동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법정적으로 신자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아담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전가되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의가 신자의 불완전한 의와 혼합된다면(의의 주입) 아무리 진실해도 칭의를 얻기에는 불충분하다. 오직 믿음으로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인 순종만이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영생을 위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가 있다.

 

전문 신학용어의 중요성

성경의 많은 복잡한 내용을 일관성 있고 조리있게 전달하려면 특별한 전문 신학 용어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전가이다. 칭의에 있어 의의 전가를 의의 주입과 혼동한다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을 경시하게 된다. 영생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의 관계를 바르게 해 주는 순종은 오직 예수님의 순종밖에 없다.

 

내다보기

그리스도의 전체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개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동적 순종으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성경적인 것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수동적 순종도 죽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인생에 순종하는 삶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에서 수동적 능동적 순종을 분리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3장 마지막 아담의 순종(정근모 목사)

 

아담에게 요구된 순종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윤곽과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생을 위해 요구하신 것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순종이었다. , 참되고 온전하게 순종해야 했으며,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순종이다. 아담에게 주신 시험적인 명령에 대한 찰스 하지의 견해 그러므로 아담에게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특정한 명령은 아담이 순종해야 했던 유일한 명령이 아니었다. 그 명령을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시험으로 주신 것은 단지 아담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에게 기꺼이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였다.”순종과 생명의 연결 패턴은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며 이 상관관계는 신약에서 실현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에 따라 완전한 의미의 생명이 임한다.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성공하셨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을 극복하려면 마지막 아담의 온전한 순종이 필요하다.

 

아담과 그리스도, 생명에 이르는 순종에 대한 바울의 견해

바울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아담의 불순종과 연관시키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독립된 순종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통일되고 전체적인 순종의 통합된 측면, 즉 절정 측면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로마서 512~21절의 논의

예수님의 순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이며 바울은 모든 사람을 죽음과 정죄에 이르게 한 한 사람의 죄즉 아담의 죄를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 사람의 순종즉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든 사람을 칭의와 생명에 이르게 한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정죄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초래했는데, 이는 아담이 대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에 대한 해결책은 두 번째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 순종은 의와 생명을 낳는다. 세상 역사에서 정죄 및 칭의와 관련한 두 핵심 인물은 죽음의 원조 아담과 생명의 원조 그리스도다.

 

로마서 5장과 예수님의 통합된 순종

죄와 죽음, 의와 생명에 대한 바울의 중요한 요점은 예수님의 완전하고 통합된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순종과 관계가 있는데 해답은 롬 5:18~19(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에 나온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순종과 관련된 적어도 세 가지 쟁점에 대해 말한다. 첫째, 영생에 이르게 하는 예수님의 순종은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다. 둘째, 바울의 논의는 영생을 위해서는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는 점을 요구한다. 셋째, 예수님은 대표 역할을 하는 마지막 아담이시며,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은 아담의 죄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있을 수 있는 반론

반론 1: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한 순종 행위다.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킨 것은 각 사람의 한 행위, 즉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은 일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에 초점이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롬 5:18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 단락 전체의 강조점은 각 사람의 특정한 행위가 아닌 대표 역할에 있다. 칭의는 온전한 의로움을 요구하며, 하나의 행위로는 얻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담의 불순종보다 나은 이유는, 그 순종이 단순히 하나의 독립된 순종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저주를 극복한 평생의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도 그리스도의 평생에 걸친 것이며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다.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통합된 순종과 관련된 논리적 구분이지 시간적 구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필수 부분이다.

 

반론 2: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바울이 영생을 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덕법이 율법의 모세 경륜에 선행하고 초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율법이 아담의 범죄 후에 왔다면 아담이 불순종한 것은 모세 율법이 아니며 하나님의 도덕법이다. 예수님은 둘째이자 마지막 아담으로서 모세 율법을 순종하셨지만, 본래 아담의 마음에 기록되었던 하나님의 도덕법을 모두 완전하게 순종하셨다. 완전한 순종은 태초에 요구되었으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도 여전히 영생을 위해 필요하기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반론 3: 아담은 예시이고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아담의 실제 행위는 그리스도의 실제 행위로만 극복될 수 있기에 당연히 아담이 실제로 첫 번째 사람이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바울의 전체 주장을 흔들거리게 하고,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면,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행위의 성격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성경은 아담의 실재성과 대표 역할에 대해 분명하고 또렷한 입장을 제시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논의에 중요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님을 새로운 아담으로, 즉 예수님의 순종이 아담이 실패한 일을 실현하고 극복한다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5장은 예수님의 전체 순종, 즉 순종의 능동적 차원과 수동적 차원 모두가 영생을 위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는 처음에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의 조건과 일치한다. 우리가 단지 죄 사함만 받았다면, 우리는 영생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5:17~21절에서 고려하는 칭의는 완전한 칭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영광스러운 칭의 교리는 필수적인 토대인 예수님의 전체 순종을 기반으로 한다.

 

로마서 5장의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해석사

5장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잠시 교회사의 몇몇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타나는 아들의 의

선재 하시는 아들은 구속의 계획과 성취에 능동적이셨고 아들의 의가 죄를 덮는다. , 긍정적인 구원 사역이 아들의 의에 기인한다. 디오그네투스에서 더 관심을 끄는 구절 하나는 이런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오 복된 교환이여, 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여, 오 예기하지 않은 은혜여, 많은 사람의 죄가 한 의로운 사람 안에 감춰지고, 한 사람의 의가 많은 죄인을 의롭게 하도다” “복된 교환"은 성육신을 통한 아들의 행위 전체이며, 의의 긍정적인 성취와 죽음을 통해 속죄 제물 되심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 디오그네투스 9장의 롬 518~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순종이 예수님의 전체적이고 단일하며 통합된 순종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으로 생각되며 디오그네투스는 바울의 언어와 개념을 반영하여 예수님의 광범위한 순종이 신자에게 영생 얻을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을 특별히 교환"이라는 용어를 통해 전달한다.

 

2. 로마서 519절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존 칼빈의 견해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 필요함을 다룬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아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우리가(개역 개정,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확실히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전 생애로 확대한다.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도 자발적인 순종이 중요한데, 이는 자원하여 드리지 않은 제사는 의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18~19절에서 완전한 순종만이 칭의를 위해 충분하다고 가르치는 것과 완전한 순종이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는 칼빈의 강조점을 주목해야 한다.

 

3. 로마서 5장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의 견해

투레티누스는 중보자의 순종이 능동적 차원과 수동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고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속상(satisfaction)이 단지 죽음만 아니라, 삶의 순종을 수반한다는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본문을 인용한다. 투레티누스의 주장은 몇 가지 단계를 특징으로 한다. 1.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체 순종을 제한 없이 다루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가리켜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5:19절의 순종은 형벌에 대한 순종뿐 아니라, 주로 율법 계명의 준수를 고려하고 있다. 3.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의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없다. 4. 바울은 아담의 순종과 반대되는 순종을 고려하고 있다. 아담에게 전체 율법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었으므로, 여기서 고려하는 순종은 전체 율법에 대한 순종이어야 한다. 5. 바울은 여기서 '형벌과 계명' 모두와 관련하여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다룬다. , 5:19절이 고려하는 의는 한 의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에서 나오는 의로움이어야만 한다. “한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죄책이 임했다면, 의는 한 행위에서 비롯되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악은 어떤 결함에서나 비롯되지만, 선은 완전한 대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 필요하며, 그러기에 롬 5장은 예수님의 전체 순종을 고려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라고 투레티누스는 결론짓는다.

 

결론

그리스도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태초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담에게 한 가지 행위만 요구되었다면, 이는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순종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할 것이 아담에게 요구되었다면,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 영생을 위해 필요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영생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전체 순종이다. 예수님의 순종의 어떤 측면이 다른 측면보다 더 필수적이 듯이, 이 전체 순종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을 통한 전체 순종의 최고의 성취다. 바울이 여러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합된 순종이 언제나 능동적이자 수동적이신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이 두 측면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절정 행위의 강조를 통해 드러난다. 5:12~21절에서 바울은 칭의가 죄 사함과 영생의 권리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바울이 보기에, 칭의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체적이고 완전한 순종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4장 모세 율법과 완전한 순종 (요약자: 이호길목사)

 

모세의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했는가?

이 질문은 신약 해석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분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세밀하게 답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모세 율법이 다면적이라고 주장하겠다. 한편으로 언약의 경륜으로서 모세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신실함에 대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은 완전히 순종하지 못해도 믿음으로 의롭게 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모세 율법은 순종에 기초한 삶의 원리를 증언하는데, 신약 저자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순종을 의지하는 우리 성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모세 율법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은 바울 서신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장의 많은 부분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주장에 할애하려 한다. 나는 또한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눅10장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보여줄 것이다. 바울과 예수님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그 순종은 반드시 완전한 순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 생명의 길은 구원을 위해 타인이 행한 일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과 대비된다. 타인이 행한 그 일은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다. 모세 율법은 영생을 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확언하는가? 나는 그렇다고 주장하겠다.

 

구속사의 모세 율법

중요한 점은 이 율법의 몇 가지 특징을 인식하는 것이다.

1. 모세 율법은 성경에서 첫 번째 율법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온전히 순종할책임이 있었다.

2. 모세 율법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에 주어졌다. 구속과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며, 영생은 신약에서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3. 아담의 범죄 이후 구약 신자들은 일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언약적으로 신실하게 행하기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지 않았다.

4. 삶의 포괄적인 규칙인 모세 율법은 단지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신약에서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 또는 목표라고 말하는 이유다. 요약하면, 한편으로 구속사의 경륜 가운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죄인인 언약 당사자들에게 주님과의 일상 교제에서 신실하게 행하라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생명의 충만함은 반드시 완전한 순종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원칙을 모세 율법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은혜 언약의 일부로서(즉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계획의 일부로서), 모세 율법은 구속받은 백성에게 매일의 순종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반면, 하나님의 도덕법은 더 근본적으로 구원을 상속하기 위한(따라서 칭의를 위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달리말하면, 율법의 모세 경륜 아래서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순종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영생을 상속하려면 궁극적으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신약 시대 신자들의 칭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칭의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한다.

 

바울 서신의 모세 율법과 완전한 순종

갈라디아서 310-141) : 모세 율법은 칭의를 위해, 따라서 영생을 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증언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믿음의 길과 행위의 길을 대비시킨다. 갈라디아서 310(27:262))

갈라디아서 311(2:43))

갈라디아서 312(18:54))

갈라디아서 313-14(21:235))

 

결론: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1014절에서 바울은 칭의가 인간의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임을 입능한다.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감당할 대리자를 필요로 한다. 갈리디아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율법으로말미아아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 바울의 대적들처럼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으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칭의가 불완전한 행위를 참작해 주어진다고 가르치는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접근법은 예속을 낳을 뿐이다. 참 자유와 칭의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임한다. 로마서 10: 로마서 10장은 갈라디아서 3장과 비슷한 주장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를 놓치는 것은 율법의 목표를 놓치는 것이며,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오해하는 것이다. 성육신을통해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이 그것을증명한다(10:96)).

 

빌립보서 3: 빌립보서 3장에서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이암은 의를 대비시킨다. 바울은 자신의 가장 열심 있는 행위조차도 영생을 이끌어 내지 못함을 깨달았다. 생명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입증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2:6-11).

 

결론: 바울 서신

모세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나타나는 긴장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개의 렌즈를 통해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첫째, 율법은 믿음의 길을 제시하는 은혜 언약의 긍정적이며 구속적인 경륜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리켜 보여야한다. 둘째, 율법 준수에 근거한 의의 추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은 아담의 죄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분에게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진실하다 해도,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율법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 :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행함을 강하게 강조하는데, 10:287)에 나오는 예수님의 문제 제기에 덧붙여, 행함이 전체 사건의 틀을 이룬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율법의 철저한 요구를 보여준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원칙이 참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문제 제기는 율법교사와 다른 어느 누구도 이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함을 보여준다. 바울 서신과 마찬가지로 눅10장에서도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가 가능하셨다고 가정하고 있다.

 

젊은 부자 관리(19:16-22; 10:17-22; 18:18-23) : 10장의 율법교사와 마찬가지로 젊은 관리는 예수님에게 영생을 상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젊은 부자 관리에 대한 예수님의 문제 제기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높음을 보여준다. 청년이 소유의 포기를 거부한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마음을 보여주며, 또한 그가 첫 번째계명을 어겼음을 의미한다. 이 두 만남 모두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하나님의율법의 요구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신다. 그들이 자기 행위를 통해 영생을 상속하려 한다면완전한 순종이 요구될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생명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행위의 길과, 생명을 얻기 위해 타인이 행한 일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이다.

 

결론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질문은 영생을 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한가이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모세 율법의 은혜성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지만, 또한 모세 율법이 증언하는 원칙은 영생이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구원을 위해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가르치는가? 바울과 예수님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모세 율법을 아담에게 주어진 율법과 관련지어야 하며,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만 완전한 순종이 가능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했으므로, 아담 이후의 자연인은 누구도 완전함을 이룰 수 없다. 아담이 대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예수님만이 영생을 위 해 필요한 완전한 순종을 실현하신다.

 

5장. 예수님의 순종과 복음서의 구원(박성하목사)

본 장에서는 저자의 또 다른 책, The Last Adam: A Theology of Obedient Life of Jesus in the Gospels(Grand Rpids: Baker Academic, 2017)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유용성을 설명합니다. , 그리스도의 순종이 예수님의 구원 성취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순종이 필요했을까? 예수님의 순종의 모든 측면이 필요했을까? 예수님의 순종이 예수님의 백성에게 유익을 준다는 논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순종이 예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가(참고 마 1:21)?의 질문을 답변하고 있습니다.

 

위에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복음서의 증거들을 토대로 설명을 하는데,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의 순종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자로서의 순종임을 논증합니다. 해석적 접근의 중요한 본문들을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에서 나타나며, 이 둘은 강한 자를 결박하시는 예수님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복음서의 해석적 접근은 예수님의 삶과 북음의 순종을 하나로 보며, 이두 측면이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장에서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의 주장 하는바, ‘아담&그리스도론을 기반으로 예수님의 순종이 대표자로서의 순종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대표, 즉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둘째이자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은 예수님의 백성에게 유익을 줍니다. 덧붙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사람은 반드시 죄 없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야만 합니다(1:35).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은 죄 때문에 누구도 완전한 순종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완전한 순종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이는 성령의 능력과 거룩함으로 잉태되셔서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 역사에서 이전에 실현한 적이 없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하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새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시험받으신 사건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에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사함이 필요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일시되신 대표자로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과 예수님 백성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지실 사람들을 대신해 대표자로서 죄 사함을 나타내는 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제거하는-역자 주) 어린양이라고 밝힙니다(1:29). 요한의 세례는 실제로 죄를 제거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해서 궁극적인 죄 씻음의 행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죄 사함의 유일한 통로로서 대리적이며, 대표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도 인류의 대표자로서 행하신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할 때 벌어지는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죄를 이기시는 거룩한 용사이십니다. 이것에 대한 논증의 도구는 누가복음의 계보입니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시험받을 때 행하신 예수님의 순종이 새로운 아담의 순종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는데, 누가복음에서의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계보를 소개한 후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계보가 하나님의 아들의 세례를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과 연결시켜서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세례 때에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곧바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십니다(4:1, 1:12, 4:1).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예수님에게 능력을 부으신 바로 그 성령은 인류의 대표자에게 자기 백성을 대신해 순종할 힘을 주신 것입니다(10:38). 시험 받으심의 순종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이 완전히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에 힘입은 능력의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밝혀 말한 자기 뒤에 오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더 강한 자(능력이 많으신 이)’인 것입니다. 성령의 힘입은 능력의 예수님은 강한 자(마귀)를 결박하는 더 강한 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으므로 더 강한 자만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받을 때 예수님의 순종은 강한 자에 대한 결박의 시작임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6장. 완전한 제사장의 순종(박성하목사)

6장에서는 예수님의 평생의 순종과 십자가의 순종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히브리서를 근거로 논증을 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제사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또한 구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더 폭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히브리서는 성경 어느 곳에서보다 더 명백하고 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을 담고 있습니다(cf.>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Papids:Eerdmans, 1955), 22~24).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통합된 순종을 더 많이 증언합니다. 따라서 6장에서는 히브리서 2,5, 10장을 근거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역을 통하여 완전한 순종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포함하며, 고난을 통해서도 완전하게 되셨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예수님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요 범주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역할입니다(저자의 논문, “Jesus, Our Great High Prist,” Credo Magazine 6, no. 2(2016): 16~21). 히브리서에서만 예수님에 대해 제사장의 명칭을 사용하여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폭넓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81절을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분은 하늘에서 존엄하신 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ESV 편집자 번역) 이는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 보다 훨씬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필적할 상대가 없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이 바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셔서 순종하시고 죄를 위해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1~4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신 분이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인성을 취하셨는데, 이는 인격적이고 영구한 결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과 선재를 전제합니다. ,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때 지음 받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존재하셨습니다. 히브리서가 시작하는 11~4절을 예수님의 신성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역할과 밀접히 연관시켰습니다. 히브리서 11~4절의 단락 구조의 중심점은 아들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예수님이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 순종하심으로 태초에 아담이 맡았던 임무처럼 피조물을 다스릴 자격을 갖추이시는 아들이심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순종하심으로 죽음 자체를 물리치시고(2:10~15), 이 일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위대한 사역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계속해서 아들의 대제사장직을 강조합니다. 이 대제사장직은 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 볼 때, 하늘의 대제사장직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1:3).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 같은 고귀한 제사장-왕으로서 예수님이 언제나 살아 계셔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에 대해 설명합니다(4:14~16, 6:19~20, 7:22~8:6, 9:24). 그러므로 이 하늘의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 후에 실현된 새로운 것이며, 따라서 아들의 순종의 완전함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고난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순종은 비할 바 없는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히브리서 210~18절은 1장의 아들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아들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구속사적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분이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시는 것이 합당한데, 이는 그분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의 선구자나 개척자, 챔피언(창시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을 물리치심을 통한 승리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고난에 연대하심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전체 삶의 순종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이겨 내셨으며, 따라서 고난당하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 가능한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 합당하므로, 인간이신 아들이 순종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심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것은 합당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 앞에서의 순종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는 마귀를 물리치지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2:14~15).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되셨으며, 이는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낳았습니다(5:9~10). 그러나 예수님은 삶 전체에 걸쳐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럼으로써 순종을 배우고 순종이 자라 가셨습니다(5:8). 존 머리는 이를 예수님의 사역과 성취를 구원의 근원으로 규정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 배우고,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고, 십자가상의 죽음의 고난에서 절정에 이른 순종이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그 일을 순종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완전히 순종하는 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도 예수님만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완전히 순종하는 제사장이심을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최종적인 제사의 관계를 다루는데 아들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드리신 새 언약 제사의 성격을 논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더 좋은 새 언약의 시작입니다(8~9). 이 새 언약은 자신을 위해 먼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던 완전한 제사장을 통해 단번에 영원히 완성되었습니다(10:1~4, 10~14). 이 최종적인 제사는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히브리서 105~7 절은 시편 406~8절을 인용함으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제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다윗의 이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외적인 의식 행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에게 헌신된 마음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반향합니다(삼상 15:22, 51:15~16, 21:3, 29:13, 6:6, 5:21~24). 완전히 순종하시는 분인 그리스도는 자신을 최종적인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 일은 다른 어떤 제사장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다른 모든 제사장은 먼저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7:27). 그러나 염소와 황소의 피는 궁극적으로 죄를 없애기에 불충분했습니다(10:4).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더 나은 하늘의 대제사장이십니다(8:1~2).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제사는 완전하고 효력이 있습니다(9:14, 28, 10:14). 흠 없는 완전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가 없을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또한 의의 긍정적인 성취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울법의 이행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며(2237~40), 나아가 내면의 순종도 요구합니다(40:8, 10:7). 그런데 예수님은 몸으로(즉 성육신하셔서) 완전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희생 제사를 통해 다윗이 시편 40편에서 예기한 구원을 가져오십니다. 히브리서 10장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셨음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 순종과 제사의 통합성을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능동적 차원과 수동적 차원을 둘 다 갖고 있다고 이해할 추가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예수님의 제사가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을 필요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굴복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셨을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 2, 최종판 LCC 20~21) 예수님 안에서만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제사가 통합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인 구원을 낳습니다(벤저민 리벤스, 저자의 책, ESBT 어약과 율법 성경신학, (부흥과 개혁사 역간, 2022). 71~74, 84~87, 108~109.,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부흥과 개혁사 역간, 2011, 3:394.).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에게 참 좋은 대제사장이 되심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제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최종적인 제사는 예수님의 순종의 절정인 최고의 행위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완전함은 예수님의 제사의 최종성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에서 분명하게 증명이 됨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증거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7장 순종, 부활, 구원(김용훈목사)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순종과 의로움이 완전하다는 성부 하나님의 판결임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입증하는 최고의 증거였다. 이는 레위기 18:15 “이를 행하면 살리라는 원칙을 예수님이 완전히 따르셨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평결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이 당하며 예수님의 순종의 삶이 아버지를 온전히 기쁘시게 했다는 사법적 증거이자 선언이다.

 

복음서의 부활과 순종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인 시인을 보여준다. 복음서에 부활 기사가 들어 있지 않았다면, 복음서 이야기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대적들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분의 행하신 모든 일이 완전히 의롭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를 확증해주셨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복음서의 부활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확증한다.

 

사도행전의 부활과 순종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행전 전체의 주요 요점 가운데 하나다. 베드로의 설교에 따르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신 의로우신 예수님은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고1/7페이지

(2:24), 부활하셨다. 죄 사함과 영생은, 부당하게 정죄를 당하셨으나 오늘날 살아 계시는(5:30),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

 

바울의 설교에 나타나는 부활과 구원

사도행전에서 바울도 구원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짓는데,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헌신하셨다는 증거다(13:16-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유죄 선고를 받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유죄 선고를 뒤집었는데,이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셨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신, 의로우신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생과 죄 사함은 예수님의 부활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영생과 죄 사함이 예수님

의 완전한 순종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기원이 아담이라고 말함으로(17:26),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의무를 모든 민족에 대한 권세를 가진 의로우시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충족시키신다.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온다. “부활은 두 측면(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이 완전함을 하나님이 사실상 선언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게할더스 보스)

 

고린도전서 15: 아담과 그리스도와 부활

로마서 5장에서처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위를 아담의 인격과 행위에 결부시켜 설명한다.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반면, 둘째 사람의 의로움을 통해 생명이 온다.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법 전체를 지키는 데실패한 결과였다. 이와 대조되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담이 했어야 할 모든 일을 그리스도가 행하신 결과였다.2/7페이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수동적이고 능동적인)을 입증하는 것, 또는 참으로 그것을 의롭다 선언하는 것(justification)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칭의의 근거다. 로마서 4:2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완전했다는 사법적 판결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만큼이나 신자의 칭의가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립보서 2: 부활 생명을 낳는 순종

빌립보서 2:8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에서 죽으심이라.” 이 구절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단지 예수님의죽음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바울의 주장은 바울이 예수님의 전체적이고 완전한 순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의 부당함을입증하는 동시에 평생의 순종을 입증한다. 즉 바울은 빌립보서 2:8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만, 독립된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삶 전체의 순종을 통합하고 완성한다. 즉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순종의 삶 전체를보여주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합당한 이유는 바울이 이후의 구절들(2:14,15)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빌립보서 2:8죽기까지에서 ‘~까지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메크리는 성경에서 그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포괄적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죽기까지는 예수님의 죽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의 모든 순종을 가리킨다.3/7페이지

 

신인(God-man)으로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

그리스도가 대표로서 하신 순종은 단지 인류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완전한 순종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신인(God-man)이시므로 예수님의 순종은 또한 신적인 행위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에 불과하셨다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순종은 반드시 신인의 순종이어야 한다. 그 이유

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속자이신 예수님께서 원죄에서 자유로우시려면 반드시 신인이셔야 한다.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출산을 통해 태어나셨다면, 그분은 아담의 자손이 되셨을 것이고 아담의 정죄 아래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산하셨고, 또 다른 아담, 즉 구속 언약의 머리, 대표로서 오셨다. 즉 예수님은 아담 아래에서 태어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원죄에서 자유로우셨고, 그분이 둘째 아담, 구속 언약의 대표시기 때문에, 그분이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과 구원을 그분의 머리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와 형벌을 감당하시려면, 우리의 구속자는 하나님이셔야 했다. 단순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견딜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한 진노와 형벌을 견딜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속하고 의로운 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한한 속죄와 의로움이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한 속죄와 의로움을 이루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게할더스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과 모든 능동적 순종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신적인 고난이며 신적인 순종이다. 즉 그것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4/7페이지

 

요약하자면, 만약 예수님의 순종이 단지 한 인간의 완벽한 순종에 불과했다면, 예수님의 의로움은 그분을 믿는 한 사람만 의롭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인으로서 순종하셨기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의로움이었고, 따라서 그분을 믿는 모든이들을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입증할 뿐 아니라, 또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부활할 것이라는 보증이기도 하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8장 예수님의 순종과 우리의 칭의(김용훈목사)

우리의 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완전히 순종하신 구주시라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행위가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의 행위는 얼마나 중요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3문과 35문의 칭의와 성화 비교

*33. 칭의란 무엇입니까? .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단회적 판결)입니다. 칭의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데, 다만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5/7페이지

 

*35. 성화란 무엇입니까? .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지속적 사역)입니다. 성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이 새로워지고, 점점 죄에 대해 죽어 가며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선언해주시는 단회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무결한 순종과 의로움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행위도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무한한 순종과 의로움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받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절대로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여기면 안 된다. 오히려 거듭난 이후에 우리의 선행은 참 믿음에서 맺히는 열매이다. 헤르만 바빙크, “칭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법적으로 주어지며, 성화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주어진다.”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의 의는 어떻게 우리의 의가 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수 있는 자격과 공로가 되는 어떤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수단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의롭다 선언 받기 위해서는, 무한하고 완전한 의로움이 필요한데,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구원을 얻는 믿음이라 해도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 받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고 완전한 순종과 의로움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그분의 의로움을 받는 수단일 뿐이다.6/7페이지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은 특별히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배경이 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하나된) 상태에서 그분의 의로움을 포함한 그분의 모든 것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존 머레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칭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 자신과 분리할 수 없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그분의 죄 용서나 의로움만 따로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는다. 즉 그리스도의 자신을 받는다. 이에 대해 헤르만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은 하나님이 은혜로 개인과 인류와 세상에게 주시는 완전한 구속을 위한 완전한 보증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우리가 이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

리스도 자신을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은 성경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결혼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에게 그분의 일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주신다. 그분의 인격 자체를 주신다. 이는 칭의와도 연관된다. 결혼 언약에 의해 남편의 모든 것이 법적으로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한 번의 결혼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삼으셨을 때, 그분의 의로움을 포함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단 번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 칭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는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9장 예수님의 순종과 우리의 순종(박원식목사)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으므로 신자의 순종은 선택사항인가?

 

선행이 어떤 점에서 선택사항이라든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엄청난 오해이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짐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할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화는 칭의와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성화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에 필수적이다. 선행은 우리의 새로운 탄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어느 하나 없이는 다른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에 트레티우스는 거룩함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추구함으로 땅에서 거룩해지지 않고 하늘에서 영화롭게 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신자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만큼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순종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최종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둘 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선행은 무엇인가? 어떤 행위가 참으로 선한 것이 되려면 네가지가 필요하다.

참 선행은 그리스도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새롭게 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위해 속죄하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의 선행을 받기를 기뻐하신다.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들만이 선행이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도덕법은 적용에서 상당히 융통성이 있다.

선행은 단순히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바른 동기로 행하는 것이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신다고 말할때에, 성경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디아) 아니라, 우리에 행위에 따른(카타) 심판을 의미한다. 고전69-11,“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2(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야고보2(참된 구원의 믿음은 행함있는 믿음), 2장 등이다.

 

에베소 2: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행위와 무관한 이 칭의는 성화의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는 않지만 선한 일을 위해 만드신 바라바로 선행을 위해 구원을 받는다.(2:10) 은혜로 새롭게 되고 구원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선행의 길을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인이 선행을 근거로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는 전혀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을 필수적인 것이다. 곧 선행은 참되고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의 증거다. 그래서 구원은 칭의와 성화를 둘다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몇가지 측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 순종을 위한 틀

믿음의 순종순종과 믿음을 대립시키지 말아야 한다. 순종은 믿음을 필요로 하며,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참 믿음은 선행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행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의 열매이다.

 

2) 하나님의 율법

율법의 도덕적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거룩함과 선행에서 자라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십계명에 순종하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으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십계명은 사랑이므로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셨고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즐거워하신 복있는 사람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이점에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모범이시며, 진정한 순종의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완전히 순종하셨기에 비록 불완전해도 우리는 자유로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4) 인내의 명령

참믿음은 또한 인내하는 믿음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며 인내하는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인내는 추상적으로 들릴수 있지만 날마다 생각해야할 문제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오늘도 계속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제10장 요구되는 것이 이루어졌다.(박원식목사)

영생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실현하셨다. 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근거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60

60: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2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3 아직도 죄로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4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가치한 나를5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6 마치 내가 죄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순종하신 것을7 내가 순종한 것처럼 대하시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의와 성결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8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 뿐입니다.9 2)로마서 3:21-28; 갈라디아서 2:16; 에베소서 2:8,9; 빌립보서 3:8-11; 3)로마서 3:9,10; 4)로마서 7:23; 5)디도서 3:4,5; 6)로마서 3:24; 에베소서 2:8; 7)로마서 4:24,25; 고린도후서 5:21; 8)로마서 4:3-5(창세기 15:6); 고린도후서 5:17-19; 요한일서 2:1,2; 9)요한복음 3:18; 사도행전 16:30,31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게서 뭔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모든 죄책과 형벌을 사면받으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즉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해야 한다. ...럴 때 우리는 마치 전혀 죄가 없거나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헤르만 바빙크)

 

이상해서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생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태초에서 즉 역사적인 인물 아담에서 시작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적절하고 세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율법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3. 칭의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표적인 순종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주는 유익을 우리가 받는 수단이며,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한다.

4. 칭의가 행위와 무관하다고 해서 신자가 참 순종의 필요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행위는 칭의를 위해 충분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들여지며, 최종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

5. 예수님의 순종의 속상(satisfactory) 신학은 성경 어느 한 본문이나 한 저자에게서 아니라 정경 전체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 밖으로 눈을 돌려, 우리 앞에 가셔서 죄의 죽음을 물리치신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는 완전한 순종의 짐에서,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다.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오지만 우리는 한 사람의 순종이 확보한 영생을 값없이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