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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3일/ 제11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2)

소망씨 2023. 2. 13. 19:30

기독교강요 13일째

 

11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2)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방인들은 우상들이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하였다.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은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이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은 형상물에 대해서 봉사하는 것이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가

 

사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문제는 이 선물을 남용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셨는데도 하나님을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는 것은 더욱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역사적으로 볼때에 순수한 교리가 우세했던 500년까지는 교회가운데 형상물들이 없었다. 다만 성직자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형상들이 없었던 시대의 고결성에 비해서 후시대는 심히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은 니케아회의에서 (787)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1:27) 또한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1:1) 수많은 말씀들을 오용해서 형상물을 합리화 하였다. 동방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형상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 형상반대자들이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구를 추가하였다.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춤을 추어라

 

참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은 혐오스러울 정도이며 그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울 정도이다. 무엇보다 이런 그들에 대해서 최고의 혐오를 가지고 대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울 일이다.